[4단계 BK21] 5차년도 학술연구 성과-참여학생 논문(KCI등재지)
  • 작성일 2025.04.09
  • 작성자 4단계 BK21 문화유산 스마트기술 융합 교육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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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혁, 박규진, 최종택, 김수빈, 장서홍, 2024, 로동신문을 통해 본 북한의 고구려ㆍ발해 인식 -2000~2020년 기사를 중심으로-, 고구려발해연구78, 고구려발해학회


이 논문은 『로동신문』 기사를 통해 북한의 고구려ㆍ발해에 대한 인식 및 고고학 연구 경향을 살펴본 글이다. 분석 대상 자료로 2000년부터 2020년까지로 제목에 ‘고구려’, ‘발해’가 들어간 기사 69건을 수집했다. 분석은 계량적 분석과 키워드 분석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사 특징과 고구려ㆍ발해 인식, 그리고 고고학 관련기사를 살펴봤다. 그 결과 『로동신문』 속 고구려ㆍ발해 기사는 새로운 소식 또는 연구 성과를 전달하는 기사보다 고구려ㆍ발해를 ‘체제선전’의 목적으로 활용한 교육 및 홍보 성격의 기사 비중이 높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리고『로동신문』은 물론 관련 학술지에서 공통으로 고구려ㆍ발해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는 점도 알 수있었다. 고고학 관련 기사는 위의 분석에 추가로 『로동신문』에 실린 발굴조사 성과가 『조선고고연구』 반영되었는지를 확인하였고, 또 비교를 위해 1946~1989년 기사 속 고고학 성과 기사를 검토했다. 이를 통해 『로동신문』에 실리는 고고학적 성과가 북한 내 모든 고고학적 성과를 대변한다고 보기 어려우며, 대체로 인민 교화 및 체제홍보에 효과적이거나 고분 또는 장신구류 발굴조사 성과 등 고고학적으로 특별한 기사만 매우 선택적으로 반영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본 연구에서는 2000년대 이후 국제 정세 또는 정치적 상황이 고구려ㆍ발해 기사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봤으나 내용적인 면에서 큰 변화는 없었다. 『로동신문』 속 고구려ㆍ발해 기사를 살펴본 결과 『조선고고연구』 등 학술지와 달리 학술적인 내용만을 접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북한 내 고구려ㆍ발해에 대한 인식 및 연구 경향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 김주형, 박규진, 최종택, 이현경, 정현운, 2025, 신빈 영릉남성지의 시공간적 의미 재검토, 고구려발해연구81, 고구려발해학회


본 연구는 신빈 영릉남성지의 유구와 출토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기존 연구에서 제시된 문화층의 시기 구분과 고구려의 점유 시기를 재검토하였다. 유구 및 문화층 시기 분석을 진행하여 일부 문화층에서 유물의 혼재 및 교란 양상이 확인한 결과, 특히 제4기 후기 문화층과 제5기 문화층에서 선행 시기의 유물이 공반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문화층의 편년을 정교하게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다음으로 4구획 연화문 와당의 출현 시기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제3기 문화층의 연대를 토기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 동한 초-후기까지 넓은 시간 범위에 분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므로 4구획 연화문 와당의 출현 시점을 현재로서는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와당의 문양이 제3기 문화층(동한 시기)부터 출현한 것으로 보고되었지만 보다 후대에 제작 및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리고 고구려의 점유 시기는 영릉남성지 제4기 후기 문화층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자료와 고구려 고분 출토 토기를 상호비교하는 작업을 통해 고구려의 영릉남성지 점유 시기를 알아보았다. 고구려의 점유 시기는 4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보고서에서 제시된 4세기 중반의 폐기 연대보다 더 늦은 시기까지 고구려가 영릉남성지를 운용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영릉남성지는 4세기대 북도의 주요거점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삼연계 유물과 고구려 유물이 동일 층위에서 공반 출토된 점을 감안한다면 고구려와 삼연 간의 군사적 대립과 충돌, 그리고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진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심혜지, 김시현, 김은경, 2025, 근대도자 전사기법의 일본 전래와 정치적 활용, 인문과학연구40,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본 연구는 근대기에 유럽에서 발달한 도자 전사기법傳寫技法이 일본으로 전래하여 활용되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도자 전사기법은 산업혁명을 통해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유럽에서 처음 상용화하였으며 이는 도자기의 장식성과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후 서구의 전사기법을 적극 수용하여 자국의 도자산업에 도입하였으며 이를 통해 대량생산 체계를 확립하고 , 수출산업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일본의 전사도자는 단순한 생활용품을 넘어 문명개화와 제국주의적 이념을 전파하는 매 , 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본 정부는 문명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전사기법을 활용한 도자를 대중적으로 보급하여 계몽주의적 도상을 전파하였으며 나아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선전 , 하기 위한 도상 제작에도 이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관한 예시로는 이국풍경과 근대식 문물 등의 계몽주의적 도상과 천황 황실 보국 및 욱일기 등의 제국주의적 도상이 주목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도자 전사기법이 일본으로 유입되어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일본 전사도자에 나타난 근대적 도상을 통해 사회 문화적 역할을 조명한다.


▶ 이종석, 김주형, 2025, 고구려 복희 여와 도상에 대한 소고, 한국상고사학보127, 한국상고사학회


고구려 복희 여와 도상은 집안 지역 고구려 후기 벽화분인 통구 사신총, 오회분4⋅5호묘에서 출현하며, 일찍이 고구려에서 단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 신화 속 제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대 복희 여와 도상은 하남, 산동, 섬서, 사천지역, 위진 시기는 감숙 지역, 남북조 시기는 북조의 수도였던 낙양, 평성, 서안에서 대다수 확인된다. 한~위진남북조 시기 복희 여와 도상은 창조신인 복희 여와가 묘주를 하늘 세계로 인도하는 인도자의 이미지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복희 여와 도상은 한~위진남북조 시기 복희 여와 도상 의의를 연용하고 있었으며, 북주와의 교류를 통해 고구려에 복희 여와 도상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집안 지역 고구려 후기 고분벽화의 주요 배경인 신선경을 묘사하던 중, 북조와의 교류를 통해 유입된 복희 여와 도상을 재해석하여 신선경에 칩거하는 신선이라는 이미지가 옅게 깔려있음과 동시에 창조신 및 하늘로 인도하는 인도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투영된 복희 여와를 고분 벽화 제재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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